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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백과

 
 
 
중국의 공식 국명은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이다.

이것은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의 탄생과 더불어 사용되기 시작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상고시대부터 황하유역에 도읍을 세운 나라들은 항상 그들이 사는 지역을 "화하(華夏)"·"중하(中夏)"·"중화(中華)"·"중국(中國)"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왔으나, 고대국가 시절에 이러한 명칭을 공식적인 국명으로 사용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1911년 10월 10일 신해혁명의 성공으로 세워진 "중화민국(中華民國)"에서 그러한 이름을 처음으로 국명에 사용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서경(書經)·무성(武成)·전(傳)≫에는, "관복의 문채가 아름다웠기 때문에 「화(華)」라 하였고, 대국이었기 때문에 「夏(하)」라하였다.

(冕服采章曰華, 大國曰夏.)"는 기록이 있고, ≪좌씨전(左氏傳)·정십(定十)·소(疏)≫에는 "성대한 예악제도를 갖추었기 때문에「하(夏)」라 하였고, 아름다운 복장을 갖추었기 때문에 「화(華)」라 하였다.(中國有禮儀之大故稱夏, 有服章之美謂之華.)"는 기록이 있다. 중국의 고대국가들은 한결같이 예악제도를 중시하였기 때문에 그것은 바로 당시의 문화를 대표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예악제도에 필요한 아름다운 복장을 구비하고 있었다는 것은 바로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화하(華夏)"는 바로 문화를 가진 대국이라는 뜻이 될 것이다.
그리고 "중(中)"은 사방의 중앙에 위치한다는 뜻이므로, "중화(中華)"는 사방의 중앙에 위치한 문화를 가진 민족을 뜻하고, "중하(中夏)"는 사방의 중앙에 위치한 대국이란 의미를 가진다.

중국이라는 말도 아주 오래전인 서주(西周)시대부터 사용되어진 용어이다. 그러나 처음에는 이 말의 의미가 다소 다양하게 사용된 적도 있었다.

즉, ≪시경(詩經)≫에서는 "수도"라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하였고(<大雅·民勞> : "惠此中國, 以綏四方."), ≪맹자(孟子)≫에서는 "제왕이 사는 곳"이란 뜻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나,(<萬章上> : "夫然後之中國踐天子位焉.") 가장 보편적인 개념으로 사용된 것은 역시 "중하(中夏)의 나라"라는 의미이다.

(≪詩經 小雅 六月序≫ : "小雅盡廢, 則四夷交侵, 中國微笑.")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중국인들은 고대로부터 자신들의 주변국들에 대한 문화적 우월성을 자부하고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그들의 주변 사방에 있는 나라들을 "사이(四夷)"라고 낮추어 불렀다. 즉, 황하(黃河) 유역을 중심으로, 그 동쪽에 있는 민족을 "동이(東夷)", 서쪽에 있는 민족을 "서융(西戎)", 남쪽에 있는 민족을 "남만(南蠻)", 북쪽에 있는 민족을 "북적(北狄)"이라 부르면서 스스로를 과시하였던 것이다.

사실 처음에는 사방의 중앙이라는 것도 황하 유역에 불과하였지만, 유구한 세월에 걸쳐 그들의 국경이 점차 확대되면서 그 의미도 점차 세계의 중앙으로 확대되어 나갔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기는 오성홍기(五星紅旗)이다.
(≪중화인민공화국헌법≫ ?제136조, ≪중화인민공화국국기법≫ 제2조 )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기는 붉은 바탕에 황색으로 된 큰 별 하나와 작은 별 4개가 왼쪽 윗부분에 배치된 도안이다.
여기에서 바탕의 붉은색은 혁명을 상징한다.
왼쪽 윗부분의 다섯 개의 별은 큰 별 하나를 중심으로 작은 별 4개가 오른쪽에서 둘러싸고 있는 모습인데, 큰 별은 중국공산당을 대표하고 4개의 작은 별은 중화인민공화국 탄생 당시 중국인민을 구성하고 있던 4개의 계급(노동자계급, 농민계급, 도시소자산계급, 민족자산계급)을 대표한다.

즉 그것은 중국공산당의 영도하에 있는 혁명인민의 대단결과 당에 대한 인민의 충심어린 옹호를 상징한다.
다섯 개의 별이 왼쪽 윗부분에 위치한 것은 마치 반짝이는 별들이 높은 곳에서 장엄·화려하고 광활한 대지를 향하여 찬란하게 빛을 발하고 있는 듯 하다.

별에 사용된 황색은 중국민족이 황색의 민족임을 상징한다.
황색은 따뜻한 색으로 우미함·온화함·고귀함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금빛 찬란한 황금색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국기의 전체적인 모양은 직사각형이며 가로 세로의 비율은 3 : 2 이다.
이 국기는 1949년 9월 27일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준비위원회 제1차 전체회의에서 공모한 3천여점의 도안 중에서 선정한 것이다1990년 6월 28일 제7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제14차 회의에서는 ≪중화인민공화국국기법≫을 제정 공포하였는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아래의 장소나 기관에서는 반드시 매일 국기를 게양해야 한다. (≪중화인민공화국국기법≫ 제5조)
 1. 북경 천안문 광장, 신화문(新華門)
  2.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국무원, 중앙군사위원회, 최고인민법원, 최고인민검찰원,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3. 외교부
  4. 출입국 공항·항구·기차역과 국경지대 항구·해안초소

☞ 아래의 기관에서는 평일에는 반드시 국기를 게양해야 한다. (≪중화인민공화국국기법≫ 제6조)
  1. 국무원 각 부처, 지방 각급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인민정부·인민법원·인민검찰원,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지방 각급 위원회
  2. 전일제학교(방학과 일요일 제외)
  중화인민공화국의 국장(國章)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상징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국장은 다섯 개의 별(국기를 상징함)이 비추고 있는 천안문(天安門)을 가운데 두고, 그 주위를 곡식의 이삭 무늬를 새긴 둥근테가 감싸고 있으며, 그 아래 중앙에 작은 톱니바퀴가 있는 도안이다.

국장의 배색은 황금색과 붉은색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곡식의 이삭 무늬가 새겨진 둥근테, 다섯 개의 별, 천안문, 톱니바퀴는 황금색이고, 둥근 테두리 안의 바탕색과 톱니바퀴를 감싸고 있는 끈은 붉은 색이다.

이 도안은 1950년 중앙인민정부위원회 제8차회의에서 통과된 ≪중화인민공화국국휘도안(中華人民共和國國徽圖案)≫과 중앙인민정부위원회 판공청에서 공포한 ≪중화인민공화국국휘도안제작설명(中華人民共和國國徽圖案制作說明)≫에 의거해 제작된 것이다.

이것은 5·4운동 이래로 시작된 신민주주의 혁명투쟁과 노동자계급이 영도하는 농공연맹을 기초로 한 인민민주전정(人民民主專政)의 중화인민공화국 탄생을 상징한다.(천안문은 5·4운동의 발생지이며 중화인민공화국 탄생의 집회장소였기 때문에 민족정신의 상징으로 도안의 중앙에 배치하였다고 한다.)

※ 아래의 기관에서는 반드시 국장을 걸어야 한다.(≪中華人民共和國國徽法≫ 제4조)
  1. 현급 이상의 각급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2. 현급이상 각급 인민정부
  3. 중앙군사위원회
  4. 각급 인민법원과 전문인민법원
  5. 각급 인민검찰원과 전문인민검찰원
  6. 외교부
  7. 외국에 주재하는 공사관과 영사관 및 기타 외교대표기관
  8. 향(鄕), 민족향(民族鄕), 진(鎭)의 인민정부 국장은 반드시 각 기관의 정문 위 한 가운데 달아야 한다.

※ 아래의 장소에서는 반드시 국장을 걸어야 한다.(≪中華人民共和國國徽法≫ 제5조)
  1. 북경 천안문 성루, 인민대회당
  2. 현급 이상의 각급 인민대표대회 및 그 상무위원회 회의실
  3. 각급 인민법원과 전문인민법원의 법정
  4. 출입국항의 적당한 장소

※ 국장은 국가에서 지정한 기업에서 일괄 제작하며, 통용되는 것은 3종류가 있다.
(≪중화인민공화국국휘법(中華人民共和國國徽法)≫ 제12조) 1. 직경 100cm 2. 직경 80cm 3. 직경 60cm
 
  중국의 국화(國花)에 대해서는 매화를 "백화(百花)의 왕"이라 하여 청대 말기에 국화로 지정하였다고 하기도 하고, 전통적으로 모란을 "꽃의 왕"이라 하여 국화로 삼고 있다고 하기도 하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아직까지 중국에는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지정한 국화가 없는 실정이다.

1999년 중국에서는 세계원예박람회가 개최되었는데, 이때 참가국들은 모두 각기 자기들의 국화를 전면에 내세웠으나 유독 중국만은 국화가 없어 낭패를 당했다.

그후 중국에서는 국화를 하루 빨리 지정하여 국가의 위상을 높이자는 여론이 일고 있다. 사실 국화 선정에 대한 요구는 1980년대부터 자주 제기되어 왔다. 당시에 중국에서는 두 차례에 걸친 민간차원에서의 화훼평가대회가 열린 적이 있었는데, 제1차대회에서는 매화가 1위, 모란이 2위를 차지하였고, 제2차대회에서는 모란이 1위, 매화가 2위를 차지하였다.

1994년 봄, 전인대 8기 2차 회의에서 농업부장 하강(何康)은 30명의 대표위원들과 합동으로 전인대상무위원회에 <국화 선정에 대한 건의>를 제출하였으며, 그 후 전인대상무위원회는 중국화훼협회에 그 일을 일임하였다.
이로써 국화 선정 활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는데, 당시 국화로 선정될 꽃에 대해서는 다음의 세가지 요구사항이 있었다고 한다.  
 
  1. 중국에서 생장하는 순수한 중국꽃
  2. 의미가 명확하고 역사 문화적으로 중국을 대표할 수 있는 꽃
  3. 재배지역이 광범위한 꽃 당시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국화로 선정될 가장 유력한 후보는 모란과 매화로 그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다고 한다.

물론 모란은 재배지역이 광범위하지 못하다는 것과 개화기간이 20일로서 짧다는 것을 단점으로 지적받기도 하였다.

1994년 10월, 전국의 각 성·시·자치구가 국화 선정을 위한 투표에 참가하였다. 그 결과, 一國一花(모란)에 찬성 18개성(전체 58.06%), 一國四花(모란·연꽃·국화·매화)에 찬성 11개성(전체 35.48%)이었다. 결국 전국국화선정위원회는 신중한 검토를 거쳐 모란을 국화로 삼고, 난초·연꽃·국화·매화를 각각 순서대로 춘하추동 4계절의 명화(名花)로 삼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1995년 개최된 전인대 8기 3차 회의에서는 여러 가지 원인으로 농업부에서 올린 국화 선정 결과를 유보시켰다. 그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중국에는 아직도 공식적으로 지정된 국화가 없는 것이다.

중국 사회조사 사무소(SSIC)가 최근에 실시한 전화여론조사 결과에 의하면, 모란을 국화로 삼자는 의견이 전체 국민의 65%로 가장 많았다. 그리고 중일 수교 10주년 때에 중일 양국은 기념우표를 발행하기로 합의하였는데, 이때 일본은 그들의 국화인 벚꽃을 우표도안으로 삽입하였고, 중국은 모란을 우표도안으로 삽입하였다. 향후 중국의 국화는 되도록 빠른 시간내에 제정될 것으로 보여지며, 그것은 바로 모란이 될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하겠다. 따라서 여기서는 향후 중국의 국화로 선정될 가능성이 가장 큰 모란에 대하여 소개하도록 하겠다.
모란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그 칭송이 끊이지 않고 있다.

모란의 재배 역사는 일찍이 위진남북조시대로부터 시작된다. 당송시대에 이르러 모란의 재배 기술은 크게 발전하였다. 당대(唐代)에 모란은 향기가 뛰어나 "꽃의 왕(花王)"이라 일컬어졌다. 명대(明代)에는 북경으로 천도한 후 극락사(極樂寺) 안에 모란을 여러 군데 심어 두었다. 청대(淸代)에는 한 왕자가 극락사에서 모란을 감상하고 "국화사(國花寺)"라는 편액을 걸어두기도 하였으니, 이미 청대부터 모란은 국화의 칭호를 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모란은 세계 각국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미 8세기에 중국의 모란이 일본으로 전해진 이후, 1330년에 프랑스, 1656년에 네덜란드, 1820년에 미국으로 전해져, 지금은 20여개국에서 중국의 모란을 재배하고 있다.

모란은 중국문화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전설에 의하면 당대에 측천무후는 모든 꽃들에게 꽃을 피우기를 명령했는데 오직 모란만이 명령을 거역하고 꽃을 피우지 않아 낙양(洛陽)으로 좌천되었다고 한다. 이로써 낙양 모란은 "천하제일"이라는 영예를 얻게 되었다. 여기에서 모란은 어떠한 위협과 권세도 두려워하지 않고 절개를 굽히지 않는 품성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중국인들은 이것이 바로 그들 중화민족의 민족성과도 부합되는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모란을 국화로 삼기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모란이 온화하면서도 우아하며, 그것이 중국의 유구한 역사와 풍부한 문화유산, 중국의 번영을 상징한다고 믿고 있다.
 
중국의 국가는 <의용군행진곡(義勇軍進行曲: 이융쥔 진싱취)>으로, 1935년에 전한(田漢: 티엔한) 작사, 섭이(니에얼) 작곡으로 탄생되었다.

<의용군행진곡>은 작자가 당시에 영화 <풍운아녀(風雲兒女: 펑윈얼뉘)>의 주제가로 창작한 것이다.

<의용군행진곡>의 탄생 배경 및 국가 채택 과정
1931년에 일제는 "9·18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의 동북3성을 침략 점령하였다.
1933년에 일본군이 다시 열하성(熱河省)을 점령하면서, 중국의 화북지역은 일제의 말발굽 아래 놓이게 되었다.
이때 전한(田漢: 티엔한)은 백색테러로 뒤덮인 상해(上海: 상하이)에 있었는데, 그는 국민당의 광폭적인 수사망을 피해 상해의 조계지로 이사하여 살 수 밖에 없었다.

당시의 음악계에서 어떤 작가들은 생사존망의 위험한 갈림길에서도 <너를 사랑해(妹妹我愛?:메이메이 워아이니)>·<도화강(桃花江: 타오화쟝)>·<이슬비(毛毛雨:마오마오 위)> 등과 같은 퇴폐적인 음악으로 인민의 혁명 의지를 타락시키고 있었고, 어떤 작가들은 태평스럽게도 현실투쟁과는 무관한 "예술가곡(藝術歌曲)"이라는 것을 써내고 있었다.

비록 몇몇 작가들이 구국적인 노래를 창작하기는 하였지만, 그들의 사상 감정이 인민대중과 하나를 이루지 못하였기 때문에 폭넓게 유행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 직면하여 전한은 민중을 분기시키고 인민의 혁명투지를 고무시킬 수 있는 가곡을 구상하게 되었다. 바로 이때 상해영화공사(上海電通影業公司)에서는 <풍운아녀(風雲兒女)>라는 영화를 제작하고 있었다.

항일구국을 주제로 한 이 영화는 국민당 통치구의 지식인들이 고민과 방황 속에서 용감하게 항일전선으로 나아간다는 내용이다. 이 극본에서는 동북지역에서 상해로 흘러 들어온 두 청년의 운명을 묘사하고 있다. 한 청년은 항일투쟁에 투신하여 영웅적으로 희생되었고, 다른 한 청년은 타락에 빠졌지만, 곤궁한 여자 친구의 도움과 남자 친구의 희생적인 격려로 지난 과오를 철저히 반성하고 마침내 항일전선으로 나아갔다. 이 영화의 내용은 원래 전한이 쓴 것인데, 그는 영화의 줄거리 설정에 따라 영화의 주인공이자 시인인 신백화(辛白華: 신바이화)가 창작한 장시 <만리장성(萬里長城: 완리창청)>을 위해, "일어나라, 노예가 되기 싫은 사람들아, 우리의 피와 살로 우리의 새 장성을 쌓자……"는 최후의 시를 지었다.

그후 그것은 영화 <풍운아녀>의 주제가인 <의용군행진곡>의 가사가 되었다. 이때 전한은 백색테러의 박해로 매우 위험한 지경에 처해 있었는데, 이 가사는 이러한 급박한 상황 속에서 담배갑 은종이 위에 쓰여졌다. 전한은 영화의 줄거리와 가사를 쓴 지 얼마 되지 않아 국민당 정부에 체포 투옥되었다. <의용군행진곡>의 작사자인 전한이 바로 적들의 총칼 앞에서 가슴 가득한 격정으로 쓴 것이 바로 이 전투적인 시편이다. 작곡자인 섭이의 처지도 전한과 마찬가지로 국민당의 위협과 박해를 받고 있었다. 섭이는 당시에 상해의 다른 영화제작회사인 화련공사(華聯公司: 화롄꿍쓰)에서 음악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도 이미 국민당의 체포 영장을 받은 상태였다. 상해의 지하당 조직은 잠정적으로 섭이의 해외 도피를 결정해 놓았고, 그 자신도 이번 기회에 당분간 해외로 유학하여 음악을 더욱 깊이 연구할 것을 고려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는 출국전 짧은 기간 동안 전력을 다해 몇가지 사업을 하고 있었다. <의용군행진곡>은 바로 이 시기에 작곡된 것이다. 섭이가 전한의 이 가사를 보고 곡을 쓸 때에, 그는 조국·인민·당에 대한 자신의 열정과 적에 대한 분개를 모두 하나 하나의 음표 속에 쏟아 넣었다.

그래서 곡의 전반적인 리듬은 우렁차고 힘이 있다. 1935년 7월, 전한이 남경(南京: 난징) 헌병사령부에서 출옥한 날에 <풍운아녀>는 개봉되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해 7월 17일 섭이(당시 24세)는 일본 등택시(藤澤市) 곡소(鵠沼) 해변에서 수영을 하다가 파도에 휩쓸려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상해에서 출판된 <<전통화보(電通畵報)>>에서 1935년 5월 16일 처음으로 <의용군행진곡>의 악보를 출간한 다음 그 음반을 제작하였다. 영화와 음반이 광고되면서 상해 도처에서는 <의용군행진곡>이 울려퍼지기 시작하였다.

그후 구국의 열기와 항일전쟁의 포화를 따라서 이 노래는 점차 중국 전역으로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이는 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중국인민들의 강렬한 분노와 반항정신을 나타낸 것이다. 1949년 9월 27일,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제1차 전체회의에서 당시 세계적인 화가 서비홍(徐悲鴻: 쉬베이홍)의 건의를 받아들여, <의용군행진곡>을 국가로 채택할 것을 결정하였다.

문화대혁명 시기에 작사자 전한이 타도 대상이 되면서 이 노래의 가사는 일시적으로 불려지지 않았으며, 1978년 제5기 인민대표대회 1차회의에서는 <의용군행진곡>의 가사를 개사하기로 결정하였다. 1982년 2월, 헌법수정안을 토론할 때에 <의용군행진곡>의 가사를 복원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나기 시작했으며, 1982년 12월 4일 제5기 전국인민대표대회 5차회의에서 <의용군행진곡>은 중국의 국가로서 원래의 가사를 회복하였다.
 
 
중국의 행정구역은 전국을 성(省)·현(縣)·진(鎭)의 세 등급으로 나누고 있다.
그 중에서 성급(省級)은 성(省)·자치구(自治區)·직할시(直轄市)·특별행정구를 포괄하고 있다.
현재 전국에는 대만성을 포함한 23개의 성과 5개의 자치구, 4개의 직할시, 2개의 특별행정구가 있다.

◎ 23개의 성

 → 흑룡강,길림,요녕,하남,하북,산서,섬서,감숙,청해,산동,안휘,강소,절강,강서,복건,호남,호북,광동,사천,귀주,운남,해남도,대만
◎ 5개의 자치구
 → 티벳자치구,신강위구르자치구,내몽고자치구,영하회족자치구,광서장족자치구
◎ 4개의 직할시
 → 북경시,상해시,천진시,중경시
◎ 2개의 특별행정구
 → 홍콩,마카오

성과 자치구 아래에는 자치주(自治州)·현(縣)·자치현(自治縣)·시(市)로 나누어져 있고, 현과 자치현 아래에는 향(鄕)과 진(鎭)으로 나누어져 있다.

직할시와 비교적 큰 시 아래에는 구(區)와 현(縣)으로 나누어져 있고, 자치주 아래에는 현과 자치현 시로 나누어져 있다. 성과 현 사이에는 몇 개의 전구(專區)로 구분되어 있는 것도 있다.

예를 들면, 하북성 아래에는 석가장전구(石家庄專區)·보정전구(保定專區)·승덕전구(承德專區)·장가전구(張家專區) 등 8개의 전구(專區)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하나의 행정단위로 인정되지 않고, 단지 성에서 현을 관리하는데 편하도록 한 것에 불과하다.

자치구 자치주 자치현은 소수민족지구의 행정단위이다.
맹(盟)과 기(旗)는 각각 내몽고자치구의 지구와 현급(縣級) 행정단위이다.